잔소리꾼 엄마, 얄미운 여동생, 공부 잘하는 형 때문에 집에 들어가기 싫어 차라리 지진이 나서 집이 무너져버렸으면 좋겠다고 중얼거리는 아이 히데카즈.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사사건건 제대로 하는 것이 없다며 구박당하던 히데카즈는 위험한 가출을 감행합니다. 결코 아름답지 않은 한 아이의 삶을 적나라하게 파헤친 수작으로 일본 현대 어린이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히데카즈의 삶은 고단합니다. 눈만 뜨면 야단을 맞는 현실에 속이 상해 자신이 야단맞기 위해서 태어난 것은 아닐까 생각할 정도이지요. 공부만을 강요하는 엄마에게 히데카즈에 대한 사랑은 눈꼽만큼도 없어보이고, 곤경에 빠진 오빠를 비웃는 것이 인생의 낙인 듯한 여동생 마유미는 쥐어박고 싶을 정도로 얄밉습니다. 히데카즈가 어디를 둘러봐도 출구가 없어보이는 이런 삶을 견디지 못하고 가출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가출은 히데카즈에게 생각지 못했던 다양한 경험을 안겨 줍니다. 동갑이지만 속이 깊은 다츠요와 무뚝뚝하지만 인정 많은 할아버지, 어딘가 모르게 수상한 분위기를 풍기는 마사나오를 만나게 되고 그로 인해 여러가지 사건들에 휘말리게 되지요. 매우 정교하게 짜여져 있어 마치 한 편의 추리소설을 읽는 듯한 흥미진진함을 주는 한편, 시대적 상황과 문제적 가정이 등장함으로써 어른과 아이의 관계, 나아가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도 깊게 생각하게 만드는 동화입니다.
저자 - 야마나카 히사시 - 1931년 일본 훗카이도 오타루에서 태어나 와세다 대학 연극과를 졸업했다. 지금까지「붉은 털의 포치」「사무라이의 아들」「내가 그 녀석이고, 그녀석이 나이고」「할아버지가 수상해요!」같은 어린이책을 썼다. 요미우리 신문사에서「야마나카 히사시 아동서 전집」을 펴내기도 했으며, 작가이자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그림 - 고바야시 요시 - 1925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나 서양화를 공부하였다. 1961년부터 주로 어린이책에 그림을 그렸으며 지금까지「잠자리 안경」「벌거벗은 산맥」「숲 속의 흰 새」「첫 용돈」등 100여 권에 이르는 책에 그림을 그렸다.
역자 - 햇살과 나무꾼 - 어린이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만든 기획실로, 지금까지「화요일의 두꺼비」「도통여우」「우리 집 가출쟁이」「한밤중 톰의 정원에서」등을 우리말로 옮겼으며,「위대한 발명품이 나를 울려요」「아낌없이 주는 친구들」「탐험가 허영호」등을 썼다.
나츠요가 보건소에 입원한 뒤로 마루진의 마사나오와 얼굴을 마주친 적은 없었다. 그러나 히데카즈는 마사나오가 어딘가에 숨어서 줄곧 히데카즈를 엿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마츠쿠마 할멈이라는 사람도 몇 번가 가 나츠요네 집에 찾아온 듯했지만, 히데카즈는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때마다 노인이 쫓아 냈기 때문이다. 여름 방학이 5일쯤 남았을 때 노인은 히데카즈를 슬그머니 헛간 옆으로 끌고 갔다. "히데카즈, 안 좋은 소식이다. 마츠쿠마 할멈과 마사나오가 요즘 부쩍 친하게 지내고 있다는구나. 너도 이제 슬슬 집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다." "네, 저도 그럴 생각이었어요. 오늘 밤에라도 나츠요한테 말하고 내일 돌아가려고요." 노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녁상을 물린 뒤 히데카즈는 나츠요한테 그 말을 꺼냈다. -p. 117-
<< 가출했다 훌쩍 큰 소년 “나는 나” >> [한국일보 / 김지영 기자]
아이를 볼 때마다 잔소리라도 한 마디 하지 않으면 뭔가 섭섭한 듯이 생각하는 엄마, ‘너는 형편없는 애야’라는 말을 아이한테 하는 인사말쯤으로 아는 엄마. 고맙기는커녕 말 못 하는 병에라도 걸렸으면 싶다. 아무리 데릴사위라지만 엄마가 무슨 말을 해도 싱글싱글 웃는 아버지, 자식들과 나란히 야단맞고도 못 들은 척하는 아버지. 조금 미안하긴 하지만 도저히 존경할 수 없다. 엄마 아빠가 지어준 히데카즈(秀一)라는 멋진 이름도 버겁고 싫다. 집을 나가고 싶다…. 그리고 정말 가출했다.
일본 작가 야마나카 히사시의 장편동화『내가 나인 것』은 1969년 출간 당시 큰 화제를 불러일으킨 작품이다. ‘부모님 말씀을 잘 듣자’ 같은, 착한 아이들의 이야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단행본으로 출간되기 전 6개월 간 잡지에 연재됐을 때 선생님과 학부모로부터 불만의 편지가 쇄도했다. ‘교육적이지 않다’는 비난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소설 속 엄마는 배 아파 낳았다는 이유만으로 아이를 자신의 소유물처럼 여기며 함부로 대하고 아이가 자신의 말을 듣지 않으면 불같이 화를 내는, ‘비뚤어진’ 모습이었다.
“너란 애는 뭘 시켜도 변변히 하는 게 없구나. 좀 노력해서 엄마를 깜짝 놀라게 해 봐”라는 말을 듣고는 정말 엄마를 깜짝 놀라게 할 생각에 히데카즈는 가출했다. 집 떠나 만난 할아버지와 손녀딸 나쓰요와 함께 지내면서 히데카즈는 홀로 서는 법을 배우고 자신감을 얻는다.
집에 돌아왔다. 엄마는 화를 내면서 히데카즈를 두들겨 팬다. 몸을 내맡겼던 아이는 어느 순간 “그만 좀 해요!”라고 소리치며 일어난다. 달라진 아이의 기세에 놀란 엄마는 “내가 죽어야지! 죽어야지!”라고 몸부림친다. 그런 엄마가 갑자기 너무 불쌍하다. ‘나더러 쓰레기라느니 머저리라느니 겁을 줘도 사실은 엄마가 젖먹이나 다름없구나.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이렇게 울부짖다니’라는 생각이 든다. 보호라는 이름으로 쌓아놓은 성(城)에서 엄마는 아이를 지배하는 왕 같았다. 엄마의 성(城)은 이렇게 무너지기 시작한다.
돈에 눈 먼 친척 마사나오의 음모에 나쓰요가 걸려들 것 같다. 본 적 없는 엄마를 그리워하는 나쓰요는 엄마를 만나게 해주겠다는 마사나오의 꾐에 빠졌다. 히데카즈는 위험을 무릅쓰고 나쓰요를 구해내고 과거를 감추느라 쉬쉬했던 할아버지에게서 나쓰요 부모님의 사연도 듣는다. 이 모든 일을 겪은 여름 히데카즈는 훌쩍 자랐다. 누가 뭐래도 “나는 나”다.
